90’s 광고·마케팅 당신이 몰랐고, 경험했고, 잊고 지냈던 이야기

상세페이지

  • HOME > 월별 특집 & 기획

90’s 광고·마케팅 당신이 몰랐고, 경험했고, 잊고 지냈던 이야기

[토·토·광] Time Leap! 90s AD&MKT

2014년에서 2015년, 해가 바뀌는 2~3주 사이에 대한민국에는 복고바람이 불었다.
‘추억의 길보드’는 아니지만 김건모, 터보, 지누션, S.E.S.의 노래가 디지털 음원이 돼 여기저기서 들렸고, 브라운관 TV가 아닌 디지털 TV에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스타들이 나와 추억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뜨겁게 달군 ‘토·토·가’를 기획·제작한 MBC <무한도전>의 김태호 PD는 토·토·가가 사랑받은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의 향수”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PD저널)
이에 동조하며 [IM]에서는 장기화하는 내수 경기 침체 속에 역성장으로 단단히 얼어붙은 광고·마케팅 시장, 그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는 광고인, 마케터들을 위해 ‘토·토·광’ 특집을 준비했다.
‘시작의 달’ 3월과 함께 떠오를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며, ‘토요일만 아니라 토요일에도’, 일주일 내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때 그 시절 광고·마케팅 속으로 지금 타임리프 하자!

Stage 1. 1990년대 광고 이슈 훑어보기
Stage 2. 당신이 몰랐고, 경험했고, 잊고 지냈던 이야기
Stage 3.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광고


‘바쁘다 바뻐, 멈출 수가 없어~♪’.
매일 찾아오는 새로운 디지털 트렌드의 습격, 시시때때로 올라오고 변하는 소비자 반응, 무시로 울리는 업무용 카톡!
광고·마케팅의 ‘요즘’은 참 바쁘다. 그래서 당신에게 휴식을 준비했다.
1990년대에 주니어, 시니어였던, 지금은 ‘장’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있는 이들을 초대해 1990년대 광고·마케팅에 대해 기탄없이 수다를 떨었다.
지금의 당신과 같은 나이대였던 그 시절 그들의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 같은 세월을 지나온 ‘당신이 경험했을 이야기’,
너무 바빠 ‘당신이 잊고 지냈던 이야기’, 당신의 마음에 속삭이는 그들의 대화에 조금만 쉬었다 가자.
지금만큼은 2015년 광고·마케팅,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진행·정리. 박태연 편집장 kite@websmedia.co.kr
사진. 박태연 편집장 kite@websmedia.co.kr ,조현아 기자 narb@websmedia.co.kr
도움. 김지훈 기자 kimji@websmedia.co.kr
후원.  한기훈 한기훈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대표
장소협찬. 가회 갤러리카페


왼쪽부터

이우철. 광고홍보학 박사 세이브더칠드런 마케팅본부 후원개발부장
백승엽.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기획2팀 리더
이태환. 캠페인 유나이티드 대표
이환선. B&A 컨설팅 대표
한기훈. 한기훈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대표

TALK SHOW

1 선망하라, 광고인


IM  1990년대에는 광고대행사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좌담회 참석자 중에는 1990년대에 한창 광고대행사 생활을 하던 사람도 있고, 소비자로 지내다 1990년대 말에야 광고대행사에 입사한 사람도 있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가보자. 그 시절 광고대행사 생활, 어떠했나.


이우철  당시에는 대기업 인하우스 대행사가 많았고, 대부분 공채 출신이었다. 그 외 몇몇 비계열 독립 대행사가 활동했고. 내가 속했던 DDB Needham DIK Korea(약칭 DDK)는 롯데그룹 소속이다 보니 롯데 광고를 많이 했다. 같은 계열사여서 우리가 전략을 제안하기보다는 틀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많았고, 기업이 한창 성장하던 시절이라 그에 맞춰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1990년대 중반에는 후반보다 덜 자유로웠다. 한 가지 황당했던 에피소드는 당시 백화점에서 롯데 직원들은 옷에 배지를 달았는데, 그게 우리한테도 내려왔다. 그거 달고 출입하라고.

한기훈  맞다. 그랬었다(하하).

이환선  나는 1990년대 광고인을 보고 꿈꿨던 세대다. 광고하고 싶다고 생각한 90년도에 고등학생이었는데, 그때는 학교에서 광고인을 직업으로 희망했던 사람이 나밖에 없었고, 광고 기획자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후 94년에 영화 <커피 카피 코피>를 통해 광고인의 모습이 매체에 비치면서 서서히 떠오르는 직군이 됐다. (한기훈 대표를 보며) 1990년대 중반에 광고인의 위상이나 경제적 대우는 어땠나요?

한기훈  나나 이우철 박사가 일했던 곳은 롯데그룹 계열사였기에 똑같은 호봉 기준에 의해 월급을 받아서 경제적 대우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태환 대표님 쪽은 그래도 괜찮았죠?

이태환  1990년대가 길어서 지금 되게 헷갈린다. (일동 웃음) 1990년대 말쯤 광고업계 급여가 한꺼번에 인상됐다. 예를 들어 부장 연봉이 3~4천만 원도 채 안 됐는데, 갑자기 6~7천만 원을 주는 회사들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회사가 TBWA다. 그래서 나도 TBWA로 옮겼는데(하하), 그때 조금 윤택해졌다. 당시 광고인들은 여러 면에서 지금보다 전문가 대우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광고주 쪽이 홍보·마케팅 분야에서 지금처럼 탄탄한 전문가 집단이 아니었다. 그래서 광고회사에 의존하는 바가 많았고, 광고회사가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 같다.

백승엽  99년에 제일보젤에 처음 입사했는데, 체감하기로 당시의 위상은 차원이 달랐다. 대학생들이 들어가고 싶은 직장에 광고대행사를 항상 꼽았고, 광고주 쪽에 있는 사람들도 광고대행사 가려다 못 가서 광고주 기업으로 갔었다. 지금은 광고주를 더 선호하는데 말이다. 1990년대 초, 중반에 선배들이 워낙 잘해놔서 전문가 대우를 받았고, 광고주 만날 때도 팀장급 이상만 만났다. 또 하나, 연봉이 그 위상을 보여준다. 당시 은행 연봉이 3,200만 원대로 가장 높다고 했는데, 내가 입사할 때 2,700만 원 정도를 받았으니까. 그런데 요즘 신입사원들 보면 그만큼도 못 받아서 안타깝다.

이환선  93, 94년도에 중앙대 광고홍보학과가 법대 수준의 커트라인이었을 정도였으니, 당시 대학생들의 광고에 대한 열망은 실로 엄청났었다.


IM  그렇다면 위상이 낮아진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태환  젊은 사람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면, 돈을 따라 가진 않는다. 요즘 영화계가 발전하는 걸 보면 더 그렇다. 영화, 드라마, 문화 업계는 광고업계보다 열악한 대우를 받는데도 프라이드가 있다. 그런데 광고업계는 이제 그런 것이 많이 사라졌다. 우리 업 자체가 남의 일을 대행해주는 역할이 크다 보니 자기 일에 굳건한 프라이드를 갖는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던 게 이유이지 않나 싶다. 광고업계는 이러고 있는데, 광고주 쪽은 예전에는 한직이라고 여겼던 홍보팀이나 마케팅팀이 이제는 가장 뛰어난 엘리트들이 가는 부서가 됐다. 그래서 과거처럼 우리한테 100%를 맡기지 않고 가이드라인을 주는 시대가 됐고, 광고대행사의 중요도와 영역이 줄면서 자연스럽게 위상이 낮아졌다.

이우철  한 가지 이야기를 더하면, 중앙대 광고홍보학과에서 7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아이들은 ‘광고’를 나와는 상당히 다른 기준에서 본다. 예를 들어 내가 젊었을 때는 연봉이 높다고 이직하는 일보다는 누구한테 배우기 위해서 옮긴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금액을 기준으로 삼더라. 즉, 하나의 직업으로 보는 경향이 커진 것이다. 어떤 업이든, 어느 선에 올라가기까지는 본인이 배우고 싶은 사람과 콘텐츠가 분명히 있어야 열정을 갖는데, 요즘에는 그런 것이 없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이는 내 또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존경할 이들이, 닮고 싶었던 대상이 있었다. 여기 계신 이태환, 한기훈 대표님처럼. 내가 보기에 우리 세대가 광고를 ‘그냥 직업’으로 생각한 첫 세대였던 것 같다. 이 때문에 후배 양성에 부족했고, 너무 우리만 생각했던 것 아닌가 싶다.

백승엽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광고대행사에 있던 많은 인재가 광고주 쪽으로 이동한 것도 이유다. 이때부터 광고대행사와 광고주의 전문가 역할이 차츰 바뀌기 시작했고, 광고주의 발언이 지닌 영향력이 세졌고, 광고대행사의 위상이 낮아졌다.








2 전통매체의 시대, 멀티채널의 시작

IM  디지털이 후반에 서서히 모습을 보였지만, 1990년대는 두말할 것 없이 ‘4대 매체(TV, 라디오, 신문, 잡지)의 시대’였다. 당시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우철  당시에는 4대 매체밖에 없는데, 광고하려는 사람은 많다 보니 수요 공급 원칙에 의해 매체의 힘이 세지고 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환선  2000년대 초반까지 잡지가 굉장히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잡지에 광고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예전에 내가 있던 회사에서는 잡지를 두 버전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커버를 달리하고, 백 커버를 두 개 받으면서. 실제로 당시 이 10만 부 팔렸다. 그 정도면 광고 없이 판매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다. 지금은 그 예산이 많은 채널로 분산됐다.


IM  1991년 국내 최초로 상업 방송국 SBS가 개국했다. 광고·마케팅 업계에도 변화가 많았을 텐데.

한기훈 SBS가 개국하면서 크리에이티브가 많이 좋아졌다. 상업 방송국답게 조금 과감하고 공격적인 경향이 있었고, 이에 광고도 발맞췄던 것 같다.

이우철  나는 외국 브랜드 광고를 오래 했는데, 당시 출시된 외국 브랜드 제품은 지방에서는 잘 안 팔았다. 그런 브랜드가 전국을 대상으로 공중파 광고를 집행하면 효과성 측면에서 돈이 낭비되니까, SBS에다 많이 진행했다. 당시 서울 및 서울 근교에 있는 2~30대 여성, 주부들을 새로운 타깃으로 했고, 이에 크리에이티브도 기존과 달리 ‘광고 전략’을 중시했다. 

한기훈  맥도날드 같은 광고주가 SBS를 굉장히 좋아했지. 싸고, 효율성도 있고, 수도권에 집중하는 재미가 있어서.



IM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SBS는 타깃팅이 가능한 채널이었다.

이우철  그렇다. 근데 경쟁이 심해서 들어가기 힘들었다. 가격은 기존 광고보다 쌌다. 전국 대상이 아니니까. 

이환선  그땐 프로그램도 몇 개 없었으니까, 지금처럼 띠 패키지로 파는 건 없었겠네요?

한기훈  잘 팔리는 것하고 안 팔리는 것하고 묶어서 팔았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KOBACO)에서 패키지로. 그래서 당시에 SBS 잡으려면, 라디오 종교방송 광고를 스폰서해야 했다. 이에 외국 광고주들이 대행사에 항의하기도 했다(허허). 그런데 이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거였다. 현업에 있는 백승엽 국장님, 지금도 이런 게 있죠?

백승엽  그럼요(웃음).


IM  영향은 미미했지만, 1990년대 중·후반에 케이블 TV, 위성 TV도 생겼다. 나름 멀티채널이 된 셈이다.

한기훈  미약했다. 시청률이 너무 낮아서 광고주들이 안 좋아했다. 당시 제일 강력했던 채널의 등장은 ‘홈쇼핑’이었다. 홈쇼핑이 1990년대 후반에 엄청나게 성공했다. 그래서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배우러 오고 그랬다.

백승엽  종편이 등장하면서 워낙 콘텐츠가 좋아지다 보니 지금은 케이블 광고 단가가 공중파와 거의 비슷하게 가고 있다. 예전에는 단가 자체를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요즘에는 케이블 프로그램들이 타깃팅 기능이 있어 효율성이 높다는 이유로 광고주들도 많이 선택한다.

이우철  IMF 터진 후 대행사에서 잘나가던 사람들을 뽑아서 삼성영상사업단, 현대영상사업단 등으로 보냈다. 두 사업단 모두 방송 채널을 갖고 있었는데, 대행사에서 잘해서 옮긴 사람들이 갑자기 광고 영업을 하게 되고 어려움을 겪다 보니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하거나 광고주 쪽으로 이직하는 일이 많아졌다. 당시 판이 한번 크게 바뀌었다.

한기훈  그때 남아서 잘 된 사람들이 지금의 케이블 TV 리더들이다.



IM  케이블은 미약했어도, ‘93년 대전 엑스포’와 다수 스포츠 행사 이후 BTL, 특히 프로모션, 옥외광고가 활발했다. 실제로는 어떠했나?

한기훈  1990년대에 월트 디즈니 영화를 맡았는데, BTL이 아주 많았다. 4대 매체 외에 팸플릿도 만들고, 극장 앞에서 행사도 하고, 정말 별거 다 했다. 나중에는 중화권 스타 여명이랑 투어하는 프로젝트도 했다. 아! 그때 버스 외벽 광고도 처음 생겨났다.

이환선  얼마나 초창기였느냐면, 저런 행사를 프로모션이나 이벤트라는 말로 부르지도 않았다.

이우철  당시 효과가 좋아서 BTL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예산이 부족하고 매체가 몇 개 없어서 광고가 들어가기는 힘든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광고·마케팅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기존에 매체로 사용하지 않았던 BTL에 뛰어든 것이다. 여기에 88년부터 들어온 PR 회사들이 붙었다. 지금은 SNS가 있으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찍어서 올리면 다 아는데, 예전에는 과천에서 행사하면 서울 사람들은 몰랐다. 그런 정보를 PR 회사들이 뿌리는 역할을 많이 했다.


IM  중반 이후 PC 통신으로 인터넷 문화가 시작됐다. 온라인 광고의 문도 이때 열리지 않았나.

이환선  그 당시 시작한 건 맞지만, 사실상 온라인 광고가 하나의 산업이 된 지는 10년이 조금 넘었고, 1990년대는 자양분을 쌓는 단계였다.

이우철  당시 온라인이 주목받은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보통 기업이 재고가 많이 남으면, 프로모션으로 해결하기 위해 신문광고를 게재한다. 그런데 9단21(9단×21cm, 약 A4 크기만 한 신문광고)로 집행하면 4~5,000만 원 하니까, 매달 할 수 없다. 그럴 때 다른 방법은, 할인받아서 스포츠 신문에 하거나 반 가격에 동일한 도달을 이끌 수 있는 온라인 광고를 하는 것이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온라인 광고는 기존 매체의 보완 역할을 많이 했다
.
백승엽  예전에는 신문광고를 10억 원어치 출고하기도 했고, 톱 브랜드들이 1, 2면 갖고 싸우고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톱 브랜드 광고가 많이 빠져있더라. 젊은 사람이 주 타깃인 브랜드가 많은데, 이제 신문으로 원하는 도달을 달성할 수 없으니까. 나도 최근에 한 10년 만에 신문광고를 출고했다.

한기훈  당시에는 한 신문에만 광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면 다른 신문사에서 광고주에 쳐들어올 테니. 그렇게 모든 신문에 광고하면 비용이 많이 드는데, 그래서 온라인이 커진 것도 있다.






3 외국계 기업에서 모델까지 세계화, 바람이 불다


IM  1989년에 10여 개였던 광고대행사가 1990년 말에 64개, 1996년 말에 180여 개로 늘었다. 당시 광고대행사의 판도는 어떠했나.

이태환  1990년대는 인하우스 광고대행사의 시대였다. 엄청나게 생겼고, 기존에 있던 독립 광고대행사들이 좀 어려워졌다. 인하우스 광고대행사가 없었던 기업으로는 대우그룹이 있었다.

한기훈  맞다. 그리고 외국계 대행사도 물밀 듯이 들어왔다. 합작 형태로.

백승엽  내가 근무하던 제일보젤이 그 예다. 제일보젤은 1989년에 브라질의 보젤과 제일기획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다. 1999년에 지금의 하쿠호도제일로 바뀌었다.

한기훈  맥켄은 독립으로 조금 먼저 시작했고, 레오버넷은 뒤에 들어왔다.

이환선  지금처럼 현업 출신들이 성장하면서 독립대행사를 만든 건 언제부터였어요?

한기훈  박우덕 사장이 87년에 웰콤을 설립한 게 대표적이다. 1990년대 십 년 동안 웰콤이 정말 잘했다. 다른 독립대행사가 잘한 사례는 별로 없었다. 1990년대 광고대행사 지형은 인하우스 대행사 한 그룹, 외국계 합작회사 한 그룹, 웰콤과 같은 독특한 존재 한 그룹이었다.



IM  당시 대우가 마케팅을 잘했던 거로 기억한다. ‘쉿-!’ 레간자 광고도 있고. 인하우스 광고대행사가 없었으면, 어디서 맡아서 했나.

이태환  내가 삼희기획(한컴 전신)에 있을 때 대우 광고를 했었다. 레간자 광고는 웰콤에서 했고.

백승엽  코래드가 대우의 인하우스 광고대행사처럼 했었다.

한기훈  그래서 대우그룹 부도났을 때 코래드가 가장 타격이 컸다. 또, IMF가 끝나면서 국내 대행사들이 해외에 사무소, 지사를 많이 차렸다. 이 중에 경험한 사람은 없지만.



IM  88 서울올림픽 이후 많은 영역이 개방됐고, 세계화 바람이 불었다. 지금 있는 외제 자동차 및 명품 브랜드는 거의 그때 들어왔다던데, 광고·마케팅에도 서구적인 변화가 있지 않았나.

이환선  우선 외국인 모델이 많이 등장했다.

일동  줄줄이 나왔다. 왕조현, 주윤발, 장국영, 샤론 스톤….

이환선  89년에 나온 주윤발의 밀키스 광고가 시작이었다. “싸랑해요, 밀키스!”로 확 뜨니까, 바로 경쟁 기업에서 똑같은 우유 탄산음료 크리미의 모델로 왕조현을 발탁해 “반했어요, 크리미”를 내보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으니, 짧지만 자주 나오는 광고는 좋아하는 타국의 배우를 볼 수 있는 굉장히 좋은 소스였다. 자연스럽게 브랜드 인지도도 올라가고.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현상이 한국과 일본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하더라.

백승엽  난 피비 케이츠 팬이었다(웃음). 예전이나 지금이나 빅 모델 효과는 상당한 것 같다. 최근 느낀 것은 중국에 부는 한류가 우리가 홍콩 영화에 심취했던 경험과 닮았다는 것이다. 한 번은 배우 김현중과 중국에서 팬 사인회를 열었고, 좋은 일 하려고 김현중이 있는 자리에서 김현중 등신대를 경매에 부쳤는데, 금액이 너무 올라가서 중단시켰다.

한기훈  당시에는 외국 광고를 그대로 쓰기도 했다. 버드와이저도 그랬고. 이우철 박사님, 그대로 갖다 쓴 거 많았잖아요?

이우철  트렌드라기보다 국내 브랜드 대비 외국 브랜드들이 돈이 없어서였다. 그때 국내 브랜드의 광고 액수가 컸다. 내가 사원, 대리일 때는 1년 예산이 10~15억 원 정도 되는 광고는 막내한테 주고 그랬다(웃음). 지금은 10억이 되게 큰돈인데 말이다. (백승엽 국장을 보며) 보통 SK텔레콤 광고 하면 매체비로 한 달에 60~70억씩 쓰지 않았어요?

백승엽  제가 할 때는 일 년에 400억 원 했었어요. 이우철 박사님과 비슷한 경험을 나도 했다. 1년 예산이 15억 원 정도였던 건을 선임이 나한테 줬었다. 예전에는 돈 많은 광고주만 광고를 많이 했던 시기여서 기본이 40~50억 원 정도였다. 요즘에는 10~15억 원 정도만 해도 대형 광고대행사까지 참석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이우철  지금은 저성장 기조지만, 당시에는 제품이 많이 팔리고 장사가 잘 되니까 경제 성장률이 높았다. 그런데 채널은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은 SOV(여론 점유율, Share of Voice)를 높이지 않으면 소비자들에게 잊히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 광고를 해야 했고, 이에 광고 금액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환선  경제적으로 보면 실제보다 우리가 더 많이 부유하다고 느끼고, 더 많이 소비했던 시대였다. 그러니 기업은 광고·마케팅 물량을 엄청나게 투하해 대중의 눈을 사로잡기만 하면, 그대로 수익으로 돌려받았었다.

한기훈  그러다 IMF를 맞았다. 





4 크리에이티브 르네상스


IM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1990년대에는 개방의 물결로 대중문화가 풍성했고, 앞서 언급했듯 소비의 시대가 열렸다. 이에 따라 신제품도 많이 등장하고, 광고 크리에이티브도 급진적으로 변화했을 텐데.

이태환  요즘 소비자는 스스로 이미지 및 가치에 부합하는 제품을 선택하는데, 그때만 해도 모니터 크기가 1cm 늘어 출시되면, 그 전에 나온 모니터는 다 끝났을 정도로 USP 경쟁이 치열했다. 그래서 광고 만들기가 쉬웠다. “숨겨진 1cm를 찾았다”처럼 USP를 강조하는 한마디를 던지면 메시지를 충분히 어필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크리에이티브에는 좋지 않은 건데, 광고인들이 USP 광고에 너무 길들지 않았나 싶다.

백승엽  요즘에는 기술 품목 광고할 때 정말 힘들다. 신기술, 신제품을 당연시해서 새로운 제품이 나와도 반응이 크지 않다.

한기훈  당시에 신제품이 정말 많았다. 김치 냉장고 딤채도 있었고, 이동통신, 휴대폰도 1990년대에 나왔다. 특히 기억나는 게 700 음성 서비스다.

백승엽  내가 ‘700-5425’를 담당했을 때는 광고비가 1년에 20억 원 정도였는데, 헤어지기 전까지 100억 원으로 올라갔었다. 전에는 전화해서 안 받으면 무조건 과금됐던 시절이라 인사말을 90%가 남겼는데, 소리샘이 나오면서부터는 음성메시지를 많이 남겼다. n016 ‘잘 자, 내 꿈 꿔’도 음성메시지를 이용한 광고였다. 당시 삐삐에도 비슷한 게 있어서 경쟁 구도도 있었다.

이태환  TBWA에 있을 때 SK텔레콤 광고를 2~3년 맡은 적 있는데, 당시부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가 생겼다. 사실 외국 망사업자들은 ‘싸다’는 요금제 광고밖에 안 하는데, 우리나라는 SK텔레콤이나 KT나 누가 형이냐, 동생이냐를 가리기 위해 엄청난 물량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등 망사업자로서 전혀 할 필요 없는 광고를 많이 만들었다. 망을 대여해서 사용료를 받는 사업이라 유형의 상품은 없는데, 그런 사람들이 일 년 내내 엄청나게 광고하다 보니까.

백승엽  처음에는 ‘잘 터진다’ 하나 갖고 싸웠던 거 같다. 한국 지형 특성상.

일동  짜장면 시키신 분! (웃음)

한기훈  이태환 대표님, SK텔레콤 대표작 있잖아요~

이태환  허허. SK텔레콤 기업 PR을 맡은 적 있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수녀가 자전거 타고 가다가 또래 비구니를 만나 뒷자리에 태우고 가는 내용이다. 당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포지션을 우리가 가지면 경쟁사들이 설 자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기업 PR을 했었고, 타사와 다르게 아날로그하게 접근해서 호응을 얻었다. 또 하나는 한석규 나오는 광고인데, 전화번호 물으니 앞번호 없이 말해서 ‘저, 011이시죠?’라고 당연하듯 물어보는 거. 당시 가짜로 알려준 번호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전화했었다(웃음).

백승엽  내가 제일보젤에 입사했을 때 SK텔레콤팀 소속이었다. 당시 한석규 나오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광고로 우리 팀 선배들이 대상을 받았었다. 그때 광고가 광고하는 사람 입장에서 참 재밌었던 것 같다. 같은 군에서 서로를 의식하며 크리에이티브로 치열하게 싸웠으니까. 요즘에는 마이웨이로 하고 있어서….

한기훈  맞다. 제품군별로 코카-콜라와 펩시가 싸우듯 그런 경쟁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IM  치열해서 그런지, 당시 크리에이티브는 기억에 잘 남더라.

이우철  집중이 되니까. 네다섯 개 매체에서 벌이는 SOV 싸움이었다. 그러다 보니 SOV가 높으면 유행하고 기억에 남기 쉬웠다. 그때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통했지만, 요즘은 매체가 많으니 그럴 수 없다.

백승엽  당시에는 IMC 개념으로 광고를 하나 만들면, 매체마다 메시지까지 모두 똑같이 집행했다.

이태환  더군다나 기업이 보유한 매체량이 많으니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던져도 소비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기훈  종합하면 한 마디 싸움이었다. ‘OK! SK’ 등 짧은 한마디가 성과 냈던 사례가 많았고, 메시지, 크리에이티브 싸움이 더 치열했다고 보면 된다.

이환선  징글도 그때 훨씬 많았다.



IM  크리에이티브 싸움에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컴퓨터 그래픽 보급도 한몫했다. 

이태환  우리나라에 맥이 처음 들어왔을 때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다. 그래서 광고회사에서 전파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두 명씩 뽑아 보냈는데, 내가 첫 번째 교육생으로 갔었다. 허허. 지금 쓰는 맥이랑 굉장히 다르고, 한번 칼로 오리면 될 일을 반복하고 떼 붙이는 것을 경험하니 이거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맥을 잘 안 하는 이유 중 하나다(웃음).

한기훈  당시 우리나라에 ‘비손텍’이라는 CG 전문회사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CG 기기 하나가 10억 원이었다. 그래서 전체 CG 작업을 하면 광고 제작비가 두 배 들고 그랬다. 하여튼 업계에서는 1990년대에 CG 했던 곳이 돈은 제일 많이 벌었다는 얘기들을 했었다. 1990년대 후반에 포스트 프로덕션으로 다 흡수되고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이태환  요새는 없는 것을 만들어내지만, 당시 CG는 피부를 수정하거나 삐뚤게 찍힌 건물을 바로잡아주는 정도였다. 그리고 예전에는 편집기사들이 감독이 시키는 대로 편집하는 단순한 수준이었는데, CG 등장 후에는 편집기사들이 나름대로 편집감을 가졌고, 편집 트렌드도 생겼다.

백승엽  1990년대에는 광고물을 JPG로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면 꽤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카톡으로 사진 찍어 바로 보내면 끝이니,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여유가 없어졌다. 선배들을 보면, 당시에 뭐 하나 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그사이에 극장도 다니고 밖의 문화를 많이 즐겼다. 그런데 요즘에는 안에서 일에 매달려있으니까 시야가 좁아지는 것 같다. (모두에게) 예전에는 업무시간에 사우나도 많이 가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일동  (동의의 미소)

이우철  하나 떠오르는 게 요즘에는 이메일이 있으니 각 나라에 리포트 보낼 때 쉽게 보내는데, 예전에는 모두 팩스로 보내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 퇴근하고 나면 한 8개국의 리포트를 갖고 와서 열한 시까지 팩스만 보냈다. 모두 완료할 때까지 서너 시간이 걸렸으니까. 이런 걸 하면서 쌓이는 아날로그 감정이 참 재밌었고,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한기훈  그래서 야근 많은 회사는 사내 연애가 많았다(하하).




5 희망하라, 광고인

IM  국내 광고산업은 1990년대 들어 매년 20% 이상 고속 성장했지만, 97년 IMF가 터지면서 매체사, 광고회사의 경영환경은 악화됐고, 광고주들은 잇따른 도산을 겪었다. 실제로 어땠나.

이태환  한컴에 있었을 때였는데, 처음엔 실감이 안 났다. 한화그룹 계열사고 방위산업체인데, 무슨 일이 있을까 했다. 그런데 당시 내가 맡은 광고 중에도 여러 개가 신용 상태가 안 좋아져서, 우리 회사에서 먼저 광고주를 내보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또 당시 내가 CD였는데, 9팀이 있던 조직이 나중에는 2팀만 남았었다. 그때 회사의 조정으로 나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환경이 너무 싫어서 스스로 다른 업종으로 간 사람도 많았다. 나중에 보니 그 사람들이 다 잘 됐더라.

한기훈  맞다.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도 그때 떠난 친구고. 당시에 나는 이우철 박사하고 같이 일했는데, 우리는 주로 외국계 기업을 맡았었다. 그래서 외화로 광고비를 받았고, 갑자기 환율이 올라서 엄청난 수입이 생겼었다.

이우철  전에는 해외 광고주 맡은 애들은 안 쳐줬었다. 작은 일, BTL이 많았고, 조사를 통해서 해야 하고, 안도 많이 만들어야 하니 크리에이터들이 싫어했다. 근데 IMF 터지고 국내 광고주가 모두 투자를 중단하니까 남은 곳은 외국계 기업밖에 없었다. 그제야 조금씩 우리가 하는 말들이 인정받고, 일이 많아졌다. 버드와이저나 존슨앤드존슨 같은 해외 광고주는 이때다 해서 좀 많이 투자했다.

백승엽  나는 광고 기획자 출신인데, IMF 이후로 AE들에게 일이 하나 더 생겼었다. 바로 채권자가 된 거다. 선배들 보면 부도나는 광고주가 워낙 많으니까 전에는 광고하러 갔던 광고주 기업에 찾아가 돈 내놓으라고 많이 했었다. 뭐라도 더 받아와야 하니까.



IM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되고, 불황이 계속되면서 요즘 광고업계도 상황이 좋지 않다. 광고업계의 굴곡을 경험한 선배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한마디를 건네달라. 약이 되는 쓴소리도 좋을 것 같다.

이태환  솔직히 IMF 이후로 오늘날까지 회복된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안됐단 생각도 든다. 후배들에게 건넬 한마디는, 우리 일은 ‘일로 생각하면’ 너무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재밌는 것을 찾고, 광고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왜냐면 소비자들도 광고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들과 똑같은 시각으로 즐겁고 재밌게 일했으면 좋겠다. 전에 들은 말인데, ‘세상에 별놈 없다. 네가 별놈이 되라’는 말이 있다. 앞서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얘길 많이 했는데, 되고 싶은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면 된다. (일동 웃음)

백승엽  나도 아직 그런 거 같은데, 보통 광고주의 요청을 중심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제품을 팔려고 한다. 물론 그런 것을 안 하면 안 되는 조직이니까 그런 것도 하되, 반대로 제안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냈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나도 선배한테 들은 얘긴데, 광고는 매력적인 일이다. 광고를 잘하면 물건이 잘 팔리니까 회사가 잘 되고, 사회와 경제도 좋아지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은 제품을 살 수 있다. 결국 광고는 좋은 봉사다. 사람을 움직이고 여러 측면에서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이 업계에 계속 좋은 사람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우철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본질의 출발점이 다를 수는 있다. ‘광고’에 대해 누군가는 물건을 파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세상을 바꾸는 좋은 방향으로 사람들을 설득해 물건을 파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광고를 통해 물건을 사지 않는다. 나도 신제품 살 때 키워드를 먼저 검색한다. 거기에 정보가 다 있으니까. 이제 광고의 역할은 애매해졌다. 그러면 무엇을 광고의 역할로 보고, 본질은 무엇인가. 결국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고, 경향을 돌릴 수 있는 일이 광고다. 물건에서 확대해서 보면, 세상에는 변화시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게 어떤 건지 스스로 정의하고, 지금껏 자신이 쌓은 공식으로 이야기하면, 어떤 매체, 도구, 방법을 활용하든 상관이 없다.

이환선  제 일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일을 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막연히 창조적인 광고인을 꿈꾸던 사람들이 현업에서 일하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한다. 내가 원하는 모습은 5년, 10년 뒤에야 될 수 있는 총괄 캠페인 기획자인데, 현실의 나는 엑셀 데이터 정리하고, 신문 스크랩하는 2, 3년 차인 거다. 그래서 이런 일 하려고 한 게 아니라며 쉽게 답을 내리고 이 일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 여기 계신 분 모두 ‘장’자가 붙는 자리에 있지만, 그 자리는 자료 조사, 파일 정리, 팩스 보내기 등 흔히 얘기하는 ‘시다’ 일을 겪지 않고서는 앉을 수 없다. 1년 만에 달인이 되는 직업은 어디에도 없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속에 품고, 크리에이티브를 밤새 고민하고 찾고 헤매는 ‘종합예술인’의 고뇌를 건너뛰지 말았으면 한다. 그러면 여기 있는 선배들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기훈  내 생각도 비슷하다. 후배들이 힘든 것을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을보다는 갑에 가려 하고 더 편해지고자 공기업에 가려는 흐름이 많은데,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고, 크리에이티브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고생도, 도전도 즐길 줄 아는 이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성공한 모델이 지금껏 많이 있으니, 그 모델을 앞으로 많이 보여줬으면 한다.

tags 월간 IM , 박태연 편집장 , 한기훈 , 한기훈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연구소 , 이환선 , 이태환 , 백승엽 , 이우철 , B&A 컨설팅 , 캠페인 유나이티드 ,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 세이브더칠드런 ,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저작권자 © 웹스미디어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콘텐츠는 저작권법 제7조 규정된 단서조항을 제외한 저작물로서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입니다.
본 기사를 개인블로그 및 홈페이지, 카페 등에 게재(링크)를 원하시는 분은
반드시 기사의 출처(로고)를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출처 없이 본 기사를 재편집해 올린 해당 미디어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절차(지적재산권법)에 따라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URL 복사 출력하기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관련기사

최신뉴스
월별 특집 & 기획
IM 본격! 어워드
월별 특집 & 기획
1990년대 광고 이슈 훑어보기
월별 특집 & 기획
90’s 광고·마케팅 당신이 몰랐고, 경험했고, 잊고 지냈던 이야기
월별 특집 & 기획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광고
오늘의 뉴스
랭키닷컴, 옐로모바일 모바일 앱 이용자 수 900만 명 예상

정기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