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듯 닿을 수 없는 너 인터페이스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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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 듯 닿을 수 없는 너 인터페이스 러브 스토리

툴이 인터페이스를 만든다 “인간의 손은 노동 수단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결과다”. 컴퓨터 없는 시대를 살았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이 말귀는 21세기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니 놀라운 일이다. 키보드를, 마우스를, 터치스크린을 신체 일부처럼 여기는 우리에게 손은 ‘수단’이지만, 동시에 디스플레이로 이를 구현하는 손의 솜씨는 ‘결과’다. 인터페이스(Interface)는 그 수단과 결과의 사이에서 접점을 마련한다. 인간과 컴퓨터 사이에서 키보드 텍스트로, 마우스 클릭으로, 스크린 터치로, 그리고 뇌의 명령으로 보낸 신호를 디스플레이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인터페이스 덕분이다. 이에 인터페이스가 변화하는 과정을 손과 같은 수단(툴)의 등장으로 추적하려 한다. 툴이 인터페이스를 만든다. 혹은 인터페이스가 툴을 바꾼다.

진행. 월간 w.e.b. 편집국

➊ CLI(Command-Line Interface)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너, 인터페이스 러브스토리
➋ GUI(Graphic User Interface) 마우스 입력의 대가는 직관적이었다, 그래픽 인 유얼 페이스
➌ 터치 UI(Touch UI) 수족을 버리고 얻은 무한한 자유, 터치 UI
➍ NUI(Natural User Interface) UI 없는 UI, PC 없는 디자인, NUI





인간이 기계에 닿는 순간 UI는 촉발한다, 말은 쉽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
0과 1로 이뤄진 바이트를 무심한 기계에 전하기 위해 쏟은 인류의 노력을.
고작 텍스트를 주고받기 위해 돌멩이부터 톱니바퀴, 천공카드, 그리고 키- 펀치까지 동원된,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처절한 구애의 기록.

글. 이태연 기자 tyl@websmedia.co.kr


돌멩이에서 앨런 튜링까지 태초에 돌멩이가 있었다. 주판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컴퓨터의 원형은 주판이다. ‘Compute’는 ‘계산하다’는 뜻이고, 거기에 ‘er’이 붙은 컴퓨터는 결국 ‘계산하는 자’다. 애초에 컴퓨터는 상인이나 수학자의 계산을 도와주는 데서 시작됐다. 즉, 그저 계산기였다. 기원전 3,700년경 메소포타미아인이 수메르 강변에서 주판알 튕기던 일에서 우리가 지금 (스마트폰의) 유리판을 두드리며 대화하고, 결제하고, 영화를 보는 행위가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컴퓨터 입력도구는 ‘돌멩이’다(여기서 주판의 인터페이스에 관해 서술하지는 않겠다).

주판 이후의 계산기는 파스칼(Blaise Pascal)이 손대면서 크게 발전했다. 1624년 개발된 최초의 기계식 계산기 ‘파스칼 라인(Pascal Line)’은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무려 ‘덧셈과 뺄셈’(!)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 기계식 계산기는 사람이 직접 다이얼을 돌리는 인터페이스였다. 그러다 1725년, 향후 200년 이상 컴퓨터 입력방식을 지배한 ‘천공카드(Punched Card)’(여전히 널리 쓰이는 OMR카드의 원형으로, 구멍이 난 부분과 나지 않은 부분을 0과 1로 구분해 비트(Bit)를 기록)가 발명된다. 1801년, 천공카드의 미래를 제시한 프랑스인이 있었다. 섬유 제조업자 조셉-마리 자카드(Joseph Marie Jacquard, 자신의 이름을 딴 원단으로 유명한 그 ‘자카드’다)는 자신이 개발한 방직기계, 자카드 직기에 일정한 패턴을 명령하는 데 성공한다. 모직에 복잡한 패턴을 넣는 일에 천공카드를 도입한 것이다. 원하는 패턴을 카드에 미리 ‘입력’하면 그것에 따라 기계가 자동으로 ‘실행’하는 방식인데, 말하자면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프로그래밍이었다.

‘천공카드’ 시스템은 섬유산업을 완전히 바꿨을 뿐만 아니라 현대 컴퓨터 기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컴퓨터의 증조할아버지쯤 되는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미분이 가능한 계산기를 설계했다)나 IBM의 창립자인 허먼 홀러리스(Herman Hollerith)가 이 기술을 응용해 초기 컴퓨터를 개발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앨런 튜링(Alan Turing) 주도로 만든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콜로서스(Colossus)’도 천공카드를 입력도구로 사용했다. 천공카드는 1980년대 중반 마그네틱 디스크가 보급되기 전까지 가정과 공공기관에서 널리 쓰였다.





컴퓨터와 인터페이스의 원형




1801년 개발된 자카드 직기(Jacquard loom)는 천공카드를 도입한 프로그래밍 기계다.




찰스 배비지의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 당시 비용 문제로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다.




키-펀치하는 삶 천공카드 시대에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어땠을까? 우선 컴퓨터 자체가 매우 비쌌고, 희귀했다. 결정적으로 무지막지하게 컸다. 'ENIAC'의 크기는 50평이 넘는다. 당연히 ‘개인용 컴퓨터(PC)’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IBM 회장이 “컴퓨터는 앞으로도 세계에 다섯 대 정도만 있을 거”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니 컴퓨터가 사람에 맞춰 개발된 것이 아니라 일단 최대한의 성능을 뽑아내는 설계로 제작하면, 거기에 사람이 맞춰야 했다. 소프트웨어도 최대한 운영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입력 방식은 주로 천공카드였고, 컴퓨터가 계산을 완료하면 이것을 다시 출력하는 단순한 형태의 일괄(Batch)처리 방식이었다. 당연히 모니터와 같은 출력화면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입력하면 반응이 오는 기계가 전혀 아니었다. 칠월 칠석날 오작교에서 만나는 견우와 직녀처럼 오매불망 기다려야 했다. 1970년대 대기업 전산실에 입사한 한국 프로그래머 1세대의 회고에 따라 당시 인터페이스 과정을 재구성해보면,



① 프로그램을 손으로 코딩한다.
② 코딩이 적힌 종이를 키-펀치실에 전달한다.
③ 키-펀처가 뚫은 천공카드를 대형컴퓨터가 설치된 기계(콤-퓨타)실 접수창구에 맡긴다.
④ 한참을 기다린 후, 그것을 찾아와서 에러난 부분을 수정한다.
⑤ 수정한 코딩지를 다시 키-펀치실에 맡긴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시의 입력도구는 ‘키 펀치(Keypunch)’였기 때문이다. 키보드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아날로그라서(타자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수정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한 번 오타가 나면 ‘다시 처음부터’ 쳐야 했다.

키 펀치를 다루는 숙련공을 ‘키 펀처(Keypuncher)’라고 했는데, 주로 여성들이었다. 1970년대 초에는 한국 여성들이 값싼 노동력 덕분에 미국으로 수주됐다. <매일경제>에 실린 1970년 5월 7일 자 기사에 따르면 “『키-펀처』들은 대부분이 여자들이며, 현재 한국은행, 국세청, 금성사, 치안국 등에서 컴퓨터를 설치할 준비를 하고 있으므로 『키-펀처』들의 일자리도 매우 넓어질 전망이고, 수년 내로 정보산업시대가 오면 이들에 대한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 예측했다(불과 4년 뒤 키-펀처들은 발주량 격감으로 정리해고됐다).

아무튼, 이 ‘키 펀치’는 자신은 수시로 고장이 나면서도, 인간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단어 선택에도 주의해야 했는데, 매우 한정된 구문과 품사로만 명령할 수 있었으며 출력된 결과물 역시 전문가가 아니면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요즘 사무직처럼 직업병을 피할 수 없었는데, 1989년에는 산업재해로 인정될 정도였으니 천공카드 컴퓨터 시대에 사용자 환경은 여간 열악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복잡한 계산을 하려면 저 정도의 천공카드로는 어림도 없었다.

키펀치는 70년대 후반까지 보편적인 인터페이스였다.




부지런한 물방아는 얼 새도 없다.




Starting MS-DOS...
\C:\> 천공카드와 키-펀치의 시대가 우리에게 아득한 과거라면, 마우스 없이 MS-DOS와 키보드만으로 작업하던 시대는 그리 낯설지 않다. 키보드로 입력한 문자가 모니터에 ‘즉시’(사실 몇 시간이 걸렸다) 출력된 것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전혀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던 전동식 타자기와 브라운관 기술의 결합이었다. 1964년, 매사추세츠공대, 벨연구소, 제너럴일렉트릭이 함께 개발한 멀틱스(Multics) 컴퓨터가 타자기 자판으로 입력한 글자를 브라운관에 그대로 표현하는 기능을 처음 구현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적 의미의 컴퓨터 키보드의 탄생이다. A, B, C와 1, 2, 3. 사람이 입력한 문자가 브라운관에 출력된다니. 드디어 인간과 컴퓨터가 실시간으로(사실 몇 시간이 걸리긴 했다) 상호작용(Interaction)하는 순간이었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컴퓨터에 키보드와 모니터를 이식한 것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연구해 온 기계, 전자, 전기 등 각종 기술을 한 곳에 융합한 최첨단의 기술이었다.

모니터와 키보드의 보급으로 시작된 '명령어 기반 인터페이스(Command-Line Interface, CLI)’. CLI 역시도 명령어를 입력할 때 한정된 단어를 사용해야 했다. 다만 입력한 데이터의 결과를 (거의)실시간으로 출력해낸 덕분에 바로바로 수정할 수 있었다. 천공카드를 들고 이리저리 오가야하는 운명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차이가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에 막대한 변화를 불러왔다. 시간과 비용의 제약이 없어지면서 개발자들이 더 모험적인 시도를 하고, 인터랙션 요소를 집어넣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한 형태의 CLI는 '명령 프롬프트'(cmd.exe 또는 COMMAND.COM으로 실행하는 명령줄 입력창)를 표시해 사용자의 명령어 입력을 기다린다. 예를 들어, [할 일] [작업 방법] [대상 파일들] 또는 [할 일] [작업 방법] < [입력 파일] > [출력 파일] 순으로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러 명령줄이 입력되면 해당 명령어를 실행하고, 결과를 문자열 형태로 출력한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 User Interface)'의 단추 또는 메뉴와는 달리, 명령 줄은(실수가 없다는 전제하에) 그 자체로 사용자가 원하는 작업을 단번에, 정확히 실행할 수 있었다.

CLI의 도래에도 여전히 진입 장벽은 높았다. 명령어를 하나부터 열까지 입력하는 인터페이스 방식이기 때문에 사용자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에 통달한 사람에게는 무궁무진한 기계였지만, 프로그래밍 언어라면 EXIT와 FORMAT밖에 모르는 일반인에게는 그저 검은 화면에 깜박거리는 막대기 하나일 뿐. 이때부터 반도의 어린이들은 신문물의 혜택을 누리고자 밤낮으로 공부했다. 심지어 지방에 컴퓨터 학원이 우후죽순 생겼다. 어째서일까?  한국 어린이들은 원래부터 얼리어답터였을까? 당시 도스(DOS) 체제에서 활발히 개발된 프로그램은 주로 텍스트 편집기(‘아래한글’과 '한메타자교사')와 게임('고인돌'과 '페르시아의 왕자')이었다. 둘 중 어느 것이 PC 열풍의 주역이었을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애플 ll (1977)






데이터포인트 3300(1967).
마우스가 대중화된 1980년대 중반 전까지는
키보드가 유일무이한 입력도구였다.



키보드로 그림을 그려봅시다.
어때요, 참 쉽죠? 당시 주로 사용했던 페인팅 프로그램은 디럭스 페인트(Deluxe Paint), Dr. Halo나 페인트브러쉬(PC PaintBrush) 등이었다. 특히 1985년 일렉트로닉 아츠(Electronic Arts)에서 개발한 디럭스 페인트는 아미가(Amiga) PC용 소프트웨어인데, 이것을 이용해서 앤디 워홀(Andy Warhol)이 그린 작품 세 점이 발견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아미가는 일찌감치 마우스를 도입했기 때문에 CLI라고 볼 수 없다).
CLI 환경에서 키보드만으로 이미지를 편집하는 것은 어땠을까? 텍스트(명령 줄)로 작업을 하는 환경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다루는 데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성이 들어갔다. 당시 자료 중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미지매직(ImageMagick)'으로 키보드를 통해 당시의 그래픽 작업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신이 왼쪽 A를 오른쪽 A로 바꾸고 싶다고 가정하자. 포토샵으로 작업한다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키보드로만 작업한다면? 다음과 같은 명령줄을 입력해야 한다.



고작 음영을 넣어 깊이감과 3D를 표현하고 색을 넣는데 이 정도다. 아직은 그럭저럭 할 만하다. 아래 이미지를 보자.



참 쉽다. 그렇지 않나? 돌이켜보면 1980년대에도 그래픽이 뛰어난 게임들이 있었다. ‘페르시아의 왕자' 같은. 당시에 그 유려한 그래픽을 어떻게 완성했을까. 페르시아의 왕자를 개발한 조던 매크너(Jordan Mechner)의 얘기에 따르면 처음에 장난삼아 동생을 액션 배우처럼 움직이라 시킨 뒤 8mm 카메라로 촬영해서 한 프레임 단위로 자른 뒤, 동작을 하나하나 입력해서 왕자의 움직임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만 석 달을 소요했다. 그리고 나서 '판자'로만 이뤄진 던전을 만들어야 했다. 왜 하필 판자였을까. 매크너의 답은 간단했다. 그냥 그게 ‘가장 만들기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판자-던전을 만드는데 8개월이 걸렸다. 최종적으로 <페르시아의 왕자>의 총 제작기간은 '25 개월'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게임 개발자와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고마워요. 당신들 덕분에 세상은 조금 더 즐길 만 했어요.”




한 프레임 한 프레임에 장인의 손길이 담겨 있었다. 
출처. www.museumofplay.org

1989년 발매한 애플 II 버전 페르시아의 왕자


tags 이태연 기자 , CLI , CUI , 천공카드 , 키-펀치 , 차분기관 , 코딩 , 페르시아의 왕자 , 디럭스 페인팅 , 페인트브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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